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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산(1박2일)여행자료▶가족공원↝금마관광단지↝제석사지↝고도리석불입상&왕궁리유적↝익산토성↝무왕릉↝원불교익산성지↝미륵사지↝사자암↝심곡사

by 여행을즐기는사람 2024. 8. 3.

가족공원  금마관광단지  익산 제석사지  고도리석불입상 & 왕궁리유적  익산토성  

익산 왕릉원 소왕릉  유천생태습지  원불교익산성지  익산 미륵사지  사자암  심곡사

↜ Tracking&Trav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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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에 많은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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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의사항

본 콘텐츠는 2024년 8월 기준으로 작성된 정보입니다.

2024년 8월 이후 변경된 사항은 문서에 반영되지 않았으므로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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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북 익산시 

 2024년 0월 0일(1일차) 전북 익산시 관광 트레킹 코스 

함벽정+가족공원 ↝ 금마관광단지+금마서동공원+조각공원+서동공원 ↝ 익산제석사지 ↝ 익산 고도리 석조여래입상 서쪽불상+고도리석불입상 왕궁리유적+익산왕궁리오층석탑+모질메산성+백제왕궁박물관 ↝ 오금산+익산토성 ↝ 익산 왕릉원 소왕릉+무왕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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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년 0월 0일(2일차) 전북 익산시 관광 트레킹 코스 

↜ 익산 미륵산(430.2m) 트레킹 

유천생태습지 ↝ 대종사성탑+대산종사성탑+정산종사성탑+원불교역사박물관+원불교중앙총부 영모전+원불교기록관+반백년기념관+대각전+원불교 중앙총부+원불교익산성지+청하원+원불교총부 ↝ 익산 미륵사지 ↝ 사자암 ↝ 심곡사 칠층석탑+심곡사

 2024년 0월 0일(1일차) 전북 익산시 관광 트레킹 코스 

0월 0일(금) 대전 출발  가족공원  주차장  서동공원 주차장  익산제석사지 주차장  

백제왕궁박물관 주차장  익산토성 주차장  무왕릉 주차장  알리앙스모텔    

거리; 91.8km시간; 2시간, 통행료; 약 3,500주유비; 약 13,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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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로주소 

가족공원 주차장; 익산시 왕궁면 동용리 564  서동공원 주차장전북 익산시 금마면 고도9길 41-14  익산제석사지 주차장; 익산시 왕궁면 왕궁리 111-6 ↝ 익산 고도리석불입상(동고도리 1086)+백제왕궁박물관 주차장; 익산시 왕궁면 궁성로 666  익산토성 주차장; 익산시 금마면 서고도리 537-3  익산 왕릉원 소왕릉 주차장; 익산시 쌍능길 65  알리앙스모텔; 전북 익산시 인북로4길 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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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북 익산시 

 2024년 0월 0일 전북 익산시 관광 트레킹 코스 

함벽정+가족공원  금마관광단지+금마서동공원+조각공원+서동공원  익산제석사지  익산 고도리 석조여래입상 서쪽불상+고도리석불입상 & 왕궁리유적+익산왕궁리오층석탑+모질메산성+백제왕궁박물관  오금산+익산토성  익산 왕릉원 소왕릉+무왕릉

2024년 0월 0일 익산 관광 트레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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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익산 함벽정(益山 涵碧亭) 

이 정자는 왕궁저수지가 준공된 1920년경, 이 고장의 부호였던 송병우가 주변의 빼어난 경치를 즐기기 위해 건립했다. 저수지 수문 옆 50여m 높이의 바위 위에 정자를 짓고 주변에 벚꽃 나무를 심었으며, 주변 연못에는 중국에서 들여온 하얀 연꽃을 심었다 한다. 푸른빛이 감도는 저수지의 맑은 물을 그려 〈함백정〉이란 이름을 붙였다. 봄에 벚꽃이 반발하여 저수지 물에 비추일 때면, 정자 이름 그대로 풍경이 극치를 이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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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익산 금마관광단지(益山金馬觀光團地) 

익산 금마면은 마한과 백제의 유적이 많은 곳으로 유명하여 매년 많은 관광객이 찾는 곳이다. 금마관광단지는 금마저수지 동쪽에 조성된 마한과 백제의 역사테마공원으로 2002년에 완공되었다. 금마관광단지는 전체 약 10만평의 부지에 조성되었으며 금마저수지 주변으로 자연생태공원이 있고, 백제를 주제로 하는 서동공원, 마한전시관, 조각공원으로 조성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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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동공원(薯童公園) 

마한과 백제의 고도(古都)인 익산시가 금마관광지 조성사업의 일환으로 1990년부터 조성하기 시작하여 2004년 개원한 공원이다. 한반도 형상을 닮은 금마저수지와 용화산을 끼고 있으며, 면적은 13만 2,000㎡(약 4만 평)에 달한다. 야외 조각공원과 박물관, 잔디광장(약 2,800㎡), 수변광장, 야외무대, 분수대, 전망대, 쉼터 등의 시설을 갖추고 있다.
서동공원이라는 명칭에 걸맞게 공원 중앙에 브론즈 조각상인 〈백제 무왕상〉이 전시되어 있고, 〈서동과 선화공주의 사랑이야기〉라는 제목의 화강석 입상과 부조 작품도 있다. 또, 서동과 선화공주의 이야기를 주제로 제작한 10여 점의 캐릭터 조형물과 스토리 판넬이 산책로를 따라 설치되어 있다. 그밖에 십이지신상을 비롯하여 화강석·브론즈·철제·오석 등으로 만든 구상·비구상의 현대적 조각 작품 100여 점이 전시되어 있다. 공원에는 익산의 구석기시대에서 마한(馬韓) 시기의 문화를 소개하고 유물을 전시하는 마한박물관도 있다. 2008년 4월 개관한 마한박물관은 지하 1층·지상 1층 규모로, 총면적은 1,326㎡이다. 세 가지 주제(마한의 성립 배경, 마한의 성립과 생활문화, 마한에서 백제로의 변화)로 구성된 상설전시실과 야외 전시공간을 갖추고 있다.

 해마다 5월 초에는 서동 설화와 서동요를 테마로 익산 서동 축제가 개최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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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익산 제석사지(益山 帝釋寺址) 

익산 제석사지(益山 帝釋寺址)는 전북특별자치도 익산시 왕궁면에 있는 백제 무왕이 수도를 왕궁평으로 옮기려고 지은 궁궐 근처에 불교의 수호신인 제석천을 중심 불상으로 모신 절이 있던 자리이다. 1998년 5월 12일 대한민국의 사적 제405호로 지정되었다.

제석사는 백제왕실의 번창과 안녕을 위해 지어진 왕실사찰이다. 동서길이가 약 100m, 남북길이가 약 170m 정도의 상당히 규모가 큰 가람이다. 1탑 1금당의 가람 배치 구조를 가지고 있는 절 중에서는 국내 최대규모이다. 7세기 중국에서 불경을 기록한 문헌인 관세음응험기의 기록에 따르면, 정관 13년(무왕 40년, 639년) 11월에 뇌우에 의해 화재가 나 제석정사의 불당(佛堂), 칠급부도(七級浮圖: 칠층탑) 및 낭방(廊房: 회랑과 승방)이 모두 소실되었으나, 주춧돌의 수정병과 금강반야경이 불타지 않고 남았다라는 기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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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익산고도리석불입상(益山古都里石佛立像) 

전북특별자치도 익산시에 있는 석불. 보물 제46호. 높이 424㎝. 이 2구의 불상은 사다리꼴 모양의 기둥과 같은 몸체에서 대좌에 이르기까지 거의 비슷한 조각수법과 형태를 보여준다.

머리 위에는 사각형의 높은 관(冠)과 개석이 있는데, 이와 비슷한 것으로 관촉사석조보살입상과 대조사석조보살입상이 있다. 웃음을 머금은 얼굴에는 가는 눈과 작고 짧은 코와 입이 표현되어 있다. 목은 따로 표현하지 않아 턱에 의해 얼굴과 어깨가 구분된다. 몸체는 굴곡이 전혀 없으며 팔은 따로 표현하지 않고 배에 붙인 두 손만 음각선으로 표현되어 있다.

법의는 앞이 터진 도포처럼 어깨에서부터 발목까지 2줄의 선으로 처리되어 있다. 대좌는 몸체보다 약간 앞으로 튀어나와 있을 뿐 아무런 장식이 없다. 이 2구의 불상은 전체 형태가 석주형인 점이나, 비사실적인 조각수법, 도포 같은 법의, 마주 잡은 손 등에서 분묘의 석인상(石人像) 가운데 문관석(文官石)과 유사한 면이 보인다. 또한 두 불상은 옥룡천이라는 개천을 사이에 두고 약 200m 간격으로 마주보고 있는데 1년에 단 한 번 12월 해일(亥日) 자시(子時)에 만난다는 전설이 있으며, 봉분처럼 쌓아올린 흙더미 위에 서 있어 불상이라기보다는 마을 수호의 성격을 띤 무속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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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익산 왕궁리 유적(益山 王宮里 遺蹟) 

왕궁리성이라고도 부르며 마한의 도읍지설, 백제 무왕의 천도설이나 별도설, 안승의 보덕국설, 후백제 견훤의 도읍설이 전해지는 유적이다. 발굴조사한 결과, 이 유적은 적어도 세 시기(백제 후기∼통일신라 후기)를 지나면서 만들어진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석탑 동쪽으로 30m 지점에서 통일신라시대 것으로 보이는 기와 가마 2기를 발견했다. 특히 탑을 에워싼 주변의 구릉지를 중심으로 직사각형 모양의 평지성으로 생각되는 성곽 유물을 찾았다. 성곽의 모습은 현재 발굴을 통해 점점 드러나고 있다. 또한 성곽 안팎으로 폭이 약 1m정도로 평평한 돌을 깔아 만든 시설이 발견되어 성곽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이 지역 안에 있는 왕궁리 오층석탑(국보 제289호)과 절터의 배치를 알 수 있게 하는 유물, 바깥쪽을 둘러싸고 있는 직사각형의 성이 발견되어, 백제 후기의 익산 천도설이나 별도설을 뒷받침하는 중요한 유적으로 떠오르고 있다. 2015년 7월 4일 독일 본에서 열린 제39차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WHC)에서 백제역사유적지구(공주지역에 2곳(공산성, 송산리 고분군), 부여 4곳(관북리 유적 및 부소산성, 능산리 고분군, 정림사지, 부여 나성), 익산 2곳(익산 왕궁리 유적, 익산 미륵사지))등 3개 지역 8곳이 세계 유산 등재 심사를 최종 통과하여 세계 유산으로 등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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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익산 왕궁리 오층 석탑 [益山王宮里五層石塔) 

전라북도 익산시 왕궁면 왕궁리(王宮里) 있는 고려 시대 오층 석탑

1965년 해체보수되어 원형이 복원되었으며국보 제289호이다.

익산 왕궁리 오층 석탑은 마한 시대 도읍지로 알려진 전북특별자치도 익산시 왕궁면에서 남쪽으로 2㎞쯤 떨어진 곳에 있는 석탑이다. 1단의 기단 위로 5층의 탑신을 올린 모습으로, 기단부가 파묻혀 있던 것을 1965년 해체·수리하여 원래의 모습으로 복원했다.
탑의 기단은 네 모서리에 8각으로 깎은 주춧돌을 기둥 삼아 놓고, 기둥과 기둥 사이에는 길고 큰 네모난 돌을 지그재그로 맞물리게 여러 층 쌓아 올려놓아 목조탑의 형식을 석탑에서 그대로 재현하고 있다. 이 팔각기둥과 네모난 돌들 사이는 흙을 다져서 메웠는데 이 속에서 백제시대의 기와조각이 발견되기도 하였다. 발굴 중에 기단 각 면의 가운데에 2개씩 기둥 조각을 새긴 것이 드러났으며, 탑의 1층 지붕돌 가운데와 탑의 중심기둥을 받치는 주춧돌에서 사리장치가 발견되었다.
1층부터 5층까지 탑신부 몸돌의 네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을 새겼으며, 1층 몸돌에는 다시 면의 가운데에 2개씩 기둥 모양을 조각했다. 지붕돌은 얇고 밑은 반듯하나, 네 귀퉁이에서 가볍게 위로 치켜져 있으며, 방울을 달았던 구멍이 뚫려 있다. 각 층 지붕돌의 윗면에는 몸돌을 받치기 위해 다른 돌을 끼워놓았다. 5층 지붕돌 위에는 탑머리 장식이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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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질메산성 

왕궁평성(王宮坪城), 모지밀산성(慕枳密山城), 익산왕궁리토성

전북특별자치도 익산시 왕궁면 일원에 있는 삼국시대 백제와 통일신라 시기에 축성된 성곽. 산성 · 왕궁터.

익산 왕궁리 유적의 행정구역 명칭은 오래 전부터 이곳에 왕궁이 있었다는 데에서 유래하고 있다. 왕궁리 유적에 관한 유래는 마한 기준도읍설, 백제 무왕천도 및 별도설, 안승 도읍설, 후백제 견훤도읍설 등 다양하다. 『신증동국여지승람』, 『대동지지』, 『익산읍지』 등의 문헌들에는 이곳이 ‘옛날 궁궐터’, ‘무왕이 별도(別都)를 세운 곳’, ‘마한의 궁성터’라고 기록되어 있다.

역사적으로 보면, 이곳은 삼국시대에는 백제에 속하여 금마저(金馬渚)라 지칭되었고, 통일신라 경덕왕 때에 금마군(金馬郡)으로 개편되었다. 조선시대에는 금마군에 소속되었으나, 근대 행정 개편시에 금마면과 왕궁면으로 분리되었다. 인접한 익산 미륵사지(彌勒寺址)와 함께 최대 규모의 백제 유적이다. 이 유적에는 백제 무왕 때인 639년에 건립하였다는 제석정사(帝釋精舍)터를 비롯해, 그 안에 관궁사(官宮寺) · 대궁사(大宮寺) 등의 절터와 대궁(大宮)터가 남아 있는 것으로 알려진 토성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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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익산토성(益山土城) 

오금산성 또는 보덕성이라고도 불리우던 백제성

익산토성은 금마면의 면 소재지에서 서북쪽 약 1.5km 떨어진 오금산의 구릉상에 위치하고 있으며, 뒤에는 미륵산이 있고 앞쪽은 익산평야가 내려다 보인다. 삼국통일 후 고구려의 왕족인 안승(安勝)이 보덕국(報德國)을 세웠던 곳이라고도 전하여 보덕성이라 부르기도 하며, 사적이다.1980년도에 원광대학교 마한·백제문화연구소 학술발굴조사에 의하면 이 성이 석성임과 성 시설 중 남문지가 밝혀졌고, 수구도 새로 발견되었다. 발견된 유물에 의하면 백제 말기에 와당류와 토기류가 주종을 이루고 있는 것으로미루어 무왕(600∼641, 재위)대의 성으로 추정된다. 또한 전하는 바에 의하면 이 성은 삼국통일 후, 신라 문무왕(661∼681년, 재위)때 고구려 왕족 안승이 보덕국을 세웠던 곳이라 하여 보덕성이라 부르기도 한 곳이다. 혹은 서동설화와 관계를 맺고 있어 오금산성이라 부르기도 한 곳이다. 오금산(五金山)의 구릉에 계곡을 감싸고 쌓은 포곡식(包谷式) 성으로 둘레가 약 450m이다. 1980년 발굴조사한 결과, 문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구역의 성벽 기초부분은 앞면에 높이 45cm, 너비 60cm, 두께 50∼60cm 크기의 직사각형 석재를 사용하여 단벽(段壁)을 쌓았고,벽석의 뒷면에는 깬돌 등의 잡석을 너비 5.2m 두께로 메웠음이 밝혀졌다. 두께는 5.5m에 이르고 남문 터에는 문루(門樓)가 설치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 익산에 백제 유물이 많은 이유 *
익산토성에서 발굴된 유적은 벼루 조각 ·세발토기조각 등이다. 대다수의 유물은 백제시대의 유물이다. 이로 인해 익산토성은 백제의 전성기에 축성한 것으로 짐작하게 되는 것이다.익산 지역에는 유난히 백제시대의 유물이 많이 나온다. 그 이유는 5세기 중엽부터 백제의 지방 중심세력이었고 7세기를 전후하여 금강변의 웅포 지역보다 내륙에 위치한 금마 지역을 중심으로 백제문화의 꽃을 피웠다. 즉, 7세기를 전후한 백제문화의 전성기 때 백제의 중심지가 바로 익산이었기 때문에 익산에 유난히 백제유물이 많은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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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릉원(王陵園) 

익산‘쌍릉공원’을‘익산 왕릉원’으로 변경...왕릉원(王陵園)은 왕과 왕비의 무덤을 이르는‘왕릉’과 왕세자, 왕족 등의 무덤을 이르는‘원’의 합성어이다.

익산 쌍릉은 1917년 일본인에 의해 조사가 이루어진 이후 지난 2018년 100년 만에 쌍릉(대왕릉)의 정식 발굴조사가 진행되어 지금까지 많은 연구자들의 왕릉급이라는 막연한 추론에서 이제는 자연과학적 분석결과나 고분 구조의 분석을 통하여 그 피장자가 무왕이라는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익산 쌍릉은 문화재청의 백제왕도 핵심 유적 보존관리 시행계획에 따라 2038년까지 토지매입, 학술조사, 경관 회복사업 등이 추진되고 있다. 특히 문화재 보호구역까지 발굴조사를 확장하여 추진 중으로 지난 2021년 발굴조사에서 무왕릉과 관련된 제의(祭儀)시설로 추정되는 대형 건물지 2동이 확인되는 등 능의 영역이 확인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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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익산시청 주변 숙박지 ↝

알리앙스모텔; 063-858-6699, 전북 익산시 인북로4길 53, 객실정보; (50,000원~)(옥션예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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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변 맛집 ↝

  2024년 0월 0일(2일차) 익산 관광 트레킹 코스 

0월 0일(토) 알리앙스모텔 출발  유천생태습지 주차장  원불교총부 주차장  

익산 미륵사지 주차장  사자암 주차장  심곡사 주차장  대전

거리; 96.5km시간; 2시간 30분, 통행료; 약 2,600원, 주유비; 약 15,2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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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일 경로주소 

유천생태습지 주차장; 익산시 동산동 1000-6  원불교익산성지 주차장; 전북 익산시 익산대로 501 ↝ 익산 미륵사지 주차장; 전북 익산시 금마면 미륵사지로 362  사자암 주차장; 익산시 금마면 신용리 산 135-5  심곡사  주차장; 익산시 낭산면 낭산리 1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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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북 익산시 

 2024년 0월 0일(2일차) 익산 관광 트레킹 코스 

유천생태습지  대종사성탑+대산종사성탑+정산종사성탑+원불교역사박물관+원불교중앙총부 영모전+원불교기록관+반백년기념관+대각전+원불교 중앙총부+원불교익산성지+청하원+원불교총부  익산 미륵사지  사자암  심곡사 칠층석탑+심곡사

2024년 0월 0일(2일) 익산 관광 트레킹 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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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천생태습지 

익산 동산동에 있는 유천생태습지공원은 만경강 지류의 분기수로인 유천에 생태습지를 조성해 하천 수질을 정화하고, 지역주민에게 쾌적한 생활공간을 제공하기 위해 2015년 준공됐다. 공원 내 전체 경관을 감상하며 산책할 수 있는 하늘언덕에도 올라가 보고, 생태수로, 가로수길, 전통정원, 미로공원, 야외공연장, 어린이 모래 놀이터 등에서 놀다 보면 하루가 어떻게 지나는지도 모를 만큼 재미있는 경험을 할 수 있다. 물길을 따라 만든 나무데크 산책로는 하루의 고단함을 내려놓고 운동과 산책을 할 수 있게 잘 조성되어 있다. 익산시에서 심혈을 기울여 만든 유천생태습지공원은 시민들에게 힐링과 휴식의 공간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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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종사성탑(塔) 

원불교의 교조 소태산대종사의 성해(聖骸)를 봉안한 탑. 전북 익산시 신룡동 344-2번지 원불교중앙총부 영모원 안쪽에 위치하며, 1949년(원기34)에 제1대성업봉찬사업의 일환으로 조성되었다. 1943년(원기28) 소태산의 열반 후, 일제의 불허에 의해 공동묘역에 임시로 마련했던 성해를 성탑을 조성하고 옮겨 안치한 것이다. 송림 사이에 계단을 조성한 고대(高臺)에 화강암으로 원형 비신을 만들어 성해를 안치했다. 기단부는 지대석과 6급 기단 및 수화, 탑갓은 옥개 5급, 상륜부는 법륜대와 연화봉으로 구성했다. 초기 성탑의 조성 당시는 교단의 경제사정과 한국전쟁 등으로 성역을 충분히 갖추지 못했는데, 수림이 변화되는 등 성탑일대의 장엄이 교단적 과제로 떠오른 가운데, 1991년(원기76) 소태산대종사탄생100주년성업봉찬회 사업의 일환으로 진입로를 넓히고 병풍석을 둘러 부조물을 조성하는 등 현재의 형태로 장엄했다. 탑의 높이는 조성 당시 732cm이던 것이 장엄사업을 통해 지대석 1급이 추가되어 총 높이 749cm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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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산종사성탑(鼎山宗師聖塔) 

소태산대종사의 상수제자로 법통을 계승하여 종법사를 역임한 정산종사의 성해(聖骸)를 안치하고 탑명을 새긴 탑. 1988년(원기73) 11월 5일, 전북 익산시 신룡동 344-2번지 원불교중앙총부 대종사성탑 동남편에 건립하여, 1971년(원기56) 영모전 서쪽에 세웠던 정산종사성탑의 성해를 옮겨 봉안했다. 소태산은 열반 후 성탑과 성비를 분리하여 건립했으나, 정산의 경우는 분리하지 않고 성탑의 배면에 탑명을 새겨 합체를 이루었는데, 새롭게 성탑을 조성하여 성해를 옮겨오면서 탑명을 성탑 후면의 병풍석에 배치했다. 탑명은 정산의 행장과 업적, 인품 등을 밝히고 있는데, 대산종사가 찬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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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불교역사박물관(圓佛敎歷史博物館) 

원불교 교조인 소태산(少太山)박중빈(朴重彬)의 종교이념을 형상화시켜 전시하고 역대 원불교 관련자료 및 역사적인 유물을 수집, 보존, 전시함으로써 대중들에게 원불교와 그 역사를 알리고 박중빈의 사상과 정신을 이해시키고자 설립되었다. 1979년 원불교 반백년기념관 3층에 원불교중앙박물관으로 개관하였다. 1991년 박중빈 탄생 백주년을 맞이하여 소태산대종사기념관을 건립하여 이전하였다. 이후 2002년 5월 건물 1동을 증축한 후 원불교역사박물관으로 명칭을 변경하여 재개관하였다. 2003년 문화관광부 1종 전문박물관으로 등록(제261호)하였다. 원불교 중앙총부 내에 위치하고 있으며, 구도과정실, 창립정신실, 봉래제법실, 소태산실, 기획전시실 등 10개의 전시실과 2개의 수장고를 갖추고 있다. 대표적인 전시로는 2002년 원불교역사박물관 재개관 기념으로 열렸던 ‘대한민국 종교복식전’ 및 대종사 열반 60주년 기념전 ‘오만년의 약속’ 등의 전시를 하였다. 전시 외에 매년 문화학교와 문화답사 등의 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하면서 종교박물관으로서의 역할 뿐 아니라 문화교육기관으로서의 역할도 수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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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불교 중앙총부 

원불교 중앙총부(익산성지)는 익산대로를 따라 함열읍충청남도 논산시로 가는 도로변에 있다. 도로를 마주보고 원광대학교와 함께 50만 평의 부지에 세워졌으며, 전법성지이자 소태산 박중빈 대종사가 건설 후 18년간 교화를 펼치고 열반에 든 곳이다.
원기 9년(1924년) 3월, 소태산 박중빈 대종사는 부안군 변산에서 교법을 제정했다. 교화를 펼칠 장소를 찾아보다가 정읍시에 있는 내장사를 점찍고, 잠시 내장사에 머물면서 상황을 지켜봤으나 계획대로 일정이 진행되지 않았다. 그 후, 전주시 완산동 전음광 선생의 집에서 제자들을 만나는데, 그 곳에서 서중안, 송만경, 이청춘, 이청풍, 문정규, 박원석, 전음광 등이 발기인이 되어 불법연구회 창립준비를 논의했다. 모임에서 회관건립 장소를 이리로 결정하고, 대종사는 제자들과 함께 이리 부근을 답사한 후 박원석의 주선으로 이리역에서 4km 떨어진 익산군 북일면 신용리에 총부 건설 기지를 정했다. 같은 해 4월 29일, 보광사에서 창립총회를 개최하며 총부 건설이 시작되었다.
중앙총부가 최초로 설립됐던 장소는 당시 익산군에 속해있는 잿배기(도치)[1]이다. 사람이 살았다는 흔적조차 없는 곳이며, 들어찬 솔 숲 사이로 황등제가 있었다. 1922년, 일제가 대아리 저수지를 준공하면서 황등제는 1923년에 사라졌고, 그 자리는 현재 원광대학교가 들어섰다. 이 건너편에 광활하지만 잡초가 무성한 땅이 있었는데, 여기가 바로 지금의 총부 자리다.
이곳에 서중안 선생이 3,945평의 대지를 구입 후 기부하며 총부 건설이 시작됐다. 이와 함께 전국에서 모인 제자들의 건축 기부금으로 원기 9년(1924년) 9월, 공사를 시작했고 11월경에 목조 초가 2동 17간을 완공했다. 이 때부터 전무출신의 공동생활이 시작되었으나 생활 자금이 부족해 불편을 겪었다. 결국 회장인 서중안 선생의 주선으로 동양척식주식회사 소유의 토지 소작농을 통해 스스로 공부할 비용을 모았다. 이렇게 중앙총부의 초기 제자들은 일제의 압박과 경제적 빈곤을 극복하면서 대종사의 뜻을 전했고, 그렇기 때문에 원불교에서 성지이자 매우 중요한 장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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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익산미륵사지 

백제 최대의 가람인 미륵사 창건에 대해서는 삼국유사에 기록되어 있다. 신라 선화공주와 혼인한 후 왕이 된 마동 즉, 무왕(백제 30대왕 600-641)이 선화공주와 함께 용화산(현재의 미륵산) 사자사의 지명법사를 찾아가던 중이었다. 그 때 갑자기 연못 속에서 미륵삼존이 출현하여, 이를 계기로 미륵사를 창건하게 되었다. 삼존을 위하여 전(금당), 탑, 낭무(화랑)을 세웠다고 한다. 이와 달리 미륵사의 창건에는 무왕과 선화공주의 신앙만이 아니라 정치적 목적이 있었을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 즉 백제의 국력을 확장하기 위해 마한 세력의 중심이었던 이곳 금마에 미륵사를 세웠을 거라는 추측이다. 백제 최대의 가람인 미륵사를 세우는 데에는 당시 백제의 건축·공예 등 각종 문화 수준이 최고도로 발휘됐을 것으로 짐작할 뿐만 아니라, 신라 진평왕이 백공을 보내 도와주었다는 삼국유사의 기록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당시 삼국의 기술이 집결되었을 것이다. 미륵사가 백제불교에서 미륵신앙의 구심점이었음은 분명하며, 신라최대의 가람인 황룡사가 화엄사상의 구심점이었던 것과 대비된다. 황룡사가 1탑 3금당식인 것과 달리 미륵사는 3탑 3금당식 가람배치이다.황룡사는 왕을 정점으로 하는 화엄사상, 미륵사는 미륵사상을 가람에 구현하고 있다. 미륵사는 일반평민 대중까지 용화세상으로 인도하겠다는 미륵신앙이 바탕을 이루고 있다.
* 미륵사지의 또다른 유물, 미륵사지 석탑과 당간지주 *
미륵사지에는 두 가지의 유물이 있어 볼거리를 더한다. 그 하나는 미륵사지 석탑이고, 다른 하나는 미륵사지 당간지주이다. 미륵사지 석탑은 국보 제 11호로 현재 높이 14.24m이고 우리나라 최고, 최대의 석탑이다. 석탑은 거의 전면이 붕괴되어 동북면 한귀퉁이의 6층까지만 남아있으나 본래는 9층으로 추정된다. 미륵사지 석탑은 1974~1975년 원광대학교 마한백제문화연구소 조사에 의하여 동쪽탑은 목탑이 아니라 석탑임이 밝혀져 이른바 동서 쌍탑의 배치였음을 알게 되었다. 동탑은 그 뒤 발굴조사에 의해서 9층으로 확인되어 1993년에 9층(높이 27.67m)으로 복원되었다. 이 석탑을 우리나라 최고의 석탑으로 보고 있는 이유는 이 탑의 양식이 그 이전에 성행하였던 목탑의 각부 양식을 나무 대신 돌로써 충실하게 재현하였기 때문이다. 당간지주란 당간을 지탱하기 위하여 당간의 좌.우에 세운 기둥, 즉 지주를 말한다. 미륵사지 당간지주는 보물 제 236호로, 높이 395cm이며 통일신라시대 중기 이전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미륵사지 석탑 남쪽에 2개의 지주가 동서로 약 90m 간격을 두고 동서로 마주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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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자암 

대한불교조계종 제17교구 본사인 금산사(金山寺)의 말사이다. 창건연대는 미상이나 백제의 무왕이 왕위에 오르기 전부터 있었던 절로 이 절에는 유명한 지명법사(知命法師)가 있어서 서동(薯童)이 자주 찾아와서 가르침을 받았다. 뒷날 서동이 선화공주를 얻은 뒤 그가 가지고 있던 보물을 신라 궁으로 보내기 위해서 이 절에 있던 지명의 신통력을 빌려 신라 궁으로 보내주었다고 한다. 그러나 지명이 머물렀던 사자사가 오늘날의 사자암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왜냐하면 현재의 암자에서 출토되고 있는 토기나 기와조각 중에 고려 이전의 것으로 추정되는 것이 발견되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절의 중건 및 중수의 역사도 거의 전래되지 않고 있다. 다만 지난날에는 이 암자를 중심으로 죽사(竹寺)·수백암(水柏庵)·만방암(萬房庵)·영혈사(靈穴寺)·명적암(明寂庵)·천정암(天定庵) 등이 있었다고 전하며, 암자 바로 밑 석굴에는 많은 소동불(小銅佛)이 봉안되어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찾아볼 수 없다. 또 암자의 서쪽에 있는 2개의 판자바위(板巖)는 석문(石門)이라고 하는데, 이 절을 창건할 때 바위를 깨낸 뒤 문을 만든 것이라고 한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대웅전과 산신각·요사채 등이 있으며, 요사채 앞에는 작은 석탑 1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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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곡사 칠층석탑(深谷寺 七層石塔) 

益山 深谷寺 七層石塔. 조선 세조 재위시기에 왕의 명으로 전북특별자치도 익산시 낭산면 장암길의 심곡사에 건립된 칠층석탑. 현재 석탑이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92호로, 내부에서 발견된 불감 1점, 불상 7구는 대한민국 보물 제1890호로 지정되어 있다.

* 심곡사의 유물 심곡사칠층석탑 *
심곡사는 전라북도 익산시 낭산면 낭산리 176번지 미륵산 기슭의 장암마을 위쪽에 위치한 대한불교조계종 제17교구 금산사의 말사이다. 심곡사는 사찰명칭에서도 알 수 있듯이 신라시대에 무염대사(無染大師)가 수도할 장소를 찾던 중 미륵산 깊은 골짜기에 들어와 절을 세움으로써 심곡사(深谷寺)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심곡사가 위치한 미륵산은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기 전 서동(薯童)왕자인 무왕(武王)이 백제의 부흥을 꿈꾸며 세웠던 미륵사가 자리 잡은 곳이기도 하다.심곡사의 대웅전 앞에 자리한 심곡사칠층석탑은 2001년 9월 21일에 전라북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원래는 심곡사에서 200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하였던 것을 현 위치로 옮겼다고 하며, 조성 시기는 고려 말 조선 초로 보고 있다.
* 심곡사칠층석탑 *
재질은 화강암이며 전체 높이는 366㎝, 기단 높이는 116㎝, 탑신 높이는 250㎝, 1층 탑신 폭은 92㎝ 정도이다. 기단(基壇)과 탑신(塔身), 상륜부(上輪部)가 비교적 잘 갖추어져 있다. 기단은 사각형의 기단석에 정교한 연꽃무늬를 조각하여 그 솜씨가 뛰어나다. 또 탑신은 비교적 낮아 안정감을 유지하고 있으며 우주(隅柱)와 탱주(撑柱)도 표현하지 않았다. 1층의 받침돌 위에 7층의 옥개석(屋蓋石)을 올리고 맨 위에는 작은 연꽃봉오리 모양의 머리장식을 얹었다. 옥신(屋身)과 옥개석이 1장의 돌로 이루어져 있다. 옥개석 받침은 3개로 표현되어 있고 경사가 완만한 옥개석의 처마끝은 모서리가 살짝 들어 올려져 있다. 바닥돌 위에 있는 받침돌에는 엎어 놓은 모습의 연꽃무늬와 위를 향한 모습의 연꽃무늬가 아래위로 각각 새겨져 있다.전체적으로 볼 때 기단부의 앙련, 복련 등은 고려시대 후기 탑의 양식이 남아있으며 옥개 받침의 약화 등 조선시대 탑의 특징이 보여지고 있어 과도기적인 석탑 양식의 변화과정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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