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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2박3일) 돈대 트레킹 자료▶강화도 54돈대 역사유적답사 관광 트레킹

by 여행을즐기는사람 2024. 7. 20.

 강화도 54돈대 역사유적답사 관광 트레킹 

↜ Tracking&Travel 

이 까페는 여행을 즐기는 사람들을 위한 카페입니다.

여행에 많은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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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천시 강화도 

  2024년 0월 0일 인천 강화도 관광 트레킹 코스 

택지돈대 ↝ 후애돈대 ↝ 분오리돈대 ↝ 곶돈대 ↝ 미루지돈대 ↝ 북일곶돈대 

↝ 장곶돈대 ↝ 선수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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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천시 강화도 

  2024년 0월 0일 인천 강화도 관광 트레킹 코스 

송강돈대 ↝ 굴암돈대 ↝ 건평돈대 ↝ 망양돈대 ↝ 삼암돈대 ↝ 계룡돈대 ↝ 망월돈대및 장성 

↝ 무태돈대 ↝ 광암돈대  연미정+곶진+월곶돈대 ↝ 회우당+옥창돈대 ↝ 염주돈대 

↝ 강화전쟁 박물관+세계테마 전시관+갑곶돈대 ↝ 더리미 순국터 ↝ 좌강돈대+용진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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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천시 강화도 

  2024년 0월 0일 인천 강화도 관광 트레킹 코스 

용당돈대 ↝ 화도돈대 ↝ 오두돈대 ↝ 강화전성 ↝ 

신미순의총+손돌목돈대+용두돈대+강화광성보 ↝ 덕진진 ↝ 초지진

 돈대(墩臺) 

성벽 위에 석재 또는 전(塼)으로 쌓아올려 망루와 포루의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높직한 누대.

1679년(숙종 5) 병조판서 김석주(金錫胄)의 건의에 따라 강화에 53개소의 돈대가 설치되었는데, 〈여지도서 輿地圖書〉에 그 명칭과 위치가 그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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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화도 전역의 요새에 설치된 54개의 돈대 

돈대는 주변 관측이 용이하도록 평지보다 높은 땅에 설치한 소규모 군사시설이다. 이를 설치해서 적이 나타나는 것을 경계하고 방어하기 위해 행성이나 해변 등에 설치한다. 이 때문에 강화도 일대는 돈대가 아주 많다. 강화도 돈대는 무려 54개나 되는 것으로 조사 되었다. 설치된 돈대는 모두 해안의 돌출된 부근에 있어서 주변의 조망도 좋을뿐더러 한강의 하구에 위치해서 가까운 곳에 배를 댈 수 있다. 그 때문에 적과 가까이서 교전을 할 수 있는 이점도 있다. 서해안은 육지와 닿은 부근이 대부분 개펄로 이뤄져서 접근이 용이하지 못한데, 강화도돈대가 설치된 부근은 개펄이 적고 물 깊이가 깊어 곧바로 배를 댈 수 있다. 아울러 돈대와 돈대 사이가 좁아서 침입하는 적을 공격하기에도 좋은 지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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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년 0월 0일(1일차) 인천 강화도 관광 트레킹 코스 

0월 0일(금) 대전 출발  택지돈대 주차장  후애돈대 주차장  분오리돈대 주차장 

 곶돈대 주차장  미루지돈대 주차장  북일곶돈대 주차장  장곶돈대 주차장 

 선수돈대 주차장  마니산호스텔

거리; 254.7km, 시간; 약5시간 30분, 통행료; 약 12,600원, 주유비; 약 39,102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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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로주소 

택지돈대 주차장; 인천 강화군 길상면 선두리 1081 ↝ 후애돈대 주차장; 인천 강화군 길상면 선두리 956-23 (선두리 954) ↝ 분오리돈대 주차장; 인천 강화군 화도면 동막리 1 ↝ 곶돈대 주차장; 인천 강화군 화도면 동막리 185-26 (동막리 185-35) 미루지돈대 주차장; 인천 강화군 화도면 여차리 170-2 ↝ 북일곶돈대 주차장; 인천 강화군 화도면 장화리 1360 (장화리 산 361) ↝ 장곶돈대 주차장; 인천 강화군 화도면 장화리 113 ↝ 선수돈대 주차장; 인천 강화군 화도면 내리 1820 (내리 1831)  마니산호스텔; 인천 강화군 화도면 마니산로 68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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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년 0월 0일(1일차) 인천 강화도 관광 트레킹 코스 

 강화도 해안수비 진지 관광 트레킹 코스 

택지돈대 ↝ 후애돈대 ↝ 분오리돈대 ↝ 곶돈대 ↝ 미루지돈대 ↝ 북일곶돈대 

↝ 장곶돈대 ↝ 선수돈대

2022년 0월 0일(1일차) 강화도 돈대 역사유적답사 관광 트레킹 코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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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택지돈대(宅只墩臺) 

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에 있는 조선후기 화강암으로 축조된 장방형의 돈대. 시도유형문화재.

1995년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강화 53돈대의 하나이다. 강화도의 해안방위를 위해 1679년(숙종 5)에 축조하였다. 주위가 84보에 치첩(雉堞 : 성벽에서 돌출시켜서 쌓은 성벽. 그 위에 첩을 둘러침.)이 37개이다.

동검북(東黔北) · 후애(後厓) 등 2개의 돈대와 더불어 선두보(船頭堡)의 관할 하에 있었다. 드물게 원형을 보존하고 있는 돈대인데, 이는 주민들이 이 곳을 마을 수호신의 제단으로 사용하여 오면서 훼손하는 사람은 재앙을 받을 것이라고 전해왔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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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애돈대(後崖墩臺) 

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 선두리에 위치한 돈대이다. 후애돈대(後崖墩臺)는 양암(陽岩) 돈대, 송곶(松串)돈대, 동검북(東檢北) 돈대, 미곶(彌串)돈대, 장곶(長串) 돈대(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북일곶(北一串) 돈대, 점암(點岩) 돈대 등과 함께 길상면에 위치하고 있다. 돈대는 외침의 방비를 위하여 강화도 섬 전체에 마치 톱니바퀴처럼 둘러쌓은 진지이다. 축성연대는 53개 돈대중 49개 돈대는 조선숙종 5년 (1679년) 기미년에 유수 윤이제 재임 시 어명에 의한 병조판서 김석주의 지휘를 받아 함경도, 황해도, 강원도 삼도의 승군(僧軍) 8,900명과 어영군 4,300명이 40일 만에 완축하였으며 빙현돈은 숙종 44년 (1718년)에 유수 권성이 축조하였으며 철북돈은 다음 해인 숙종 45년 (1719)에 유수 심현택이 축조하였고 초루돈은 그다음에 숙종 46년(1720)에 유수 어유구가 축조하였고 작성돈은 영조 (1725)에 유수 박사익이 축조하였다. 그 후 양암돈과 갈곶돈 두 돈대는 너무 오래되어 폐쇄하였고 51개 돈대만 수호 관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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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오리돈대(分五里墩臺) 

인천광역시 강화군 화도면에 있는 조선후기 강화유수 윤이제가 축조한 돈대. 성곽시설.

이 돈대는 해안으로 돌출한 산 능선의 끝부분에 위치하고 있다. 바다를 향해 돌출하여 곶을 이룬 지형에 자리하였으므로, 시야가 넓으면서 좌우에는 깊이 굽은 갯벌의 주변으로 포구가 형성되어 있다. 따라서 육지에서 진입할 때는 평지에 가깝지만 해안은 절벽과 급경사로 이루어져 있다. 평면이 네모난 여느 돈대와는 달리 지형을 그대로 살려 성벽을 쌓았기에, 평면은 반달 모양이며, 특히 동쪽 성벽 일부는 자연암반 위에 쌓았다.

성벽은 거칠게 다듬은 네모난 모양의 돌을 안팎으로 쌓았는데, 둘레가 84보라고 전하지만,지금의 안쪽 둘레는 약 70m이고 너비는 약 12.8m이다. 바다를 향해서 4개의 포좌가 설치되어 있다. 성벽 위에 쌓은 성가퀴인 치첩(雉堞)도 37개가 있었다고 하지만, 현재는 일부만 남아 있을 뿐이다. 한편 돈대의 성문은좌우에 화강석을 잘 다듬어 만든 커다란 무사석(武砂石)을 쌓고서, 그 위에 보 형식으로 긴 돌을 건너질러 놓은 모습이다. 성문 안에는 문을 설치하였던 흔적으로 장군목(將軍木)을 끼웠던 구멍이 남아있다. 현재 돈대의 평균 높이는 2.62m이고, 입구 부분의 최고 높이는 약 4m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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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곶돈대 

동막리 182번지 내비를 찍고 오니 펜션쪽으로 안내를 해준다. 강화나들길이 사유지 펜션을 지나 간다. 펜션쪽에서 송곶돈대로 진입할 수 있는 길이다. 나뭇가지 사이로 주차한 공터가 보이고 (화도면 동막리 180-2)제방에서 오른쪽으로 강화나들길 이정목이 보이고

데크계단을 올라 오니 송곶돈대 주변이 군사시설보호구역이라고 알려주는 안내판이 보인다.

송곶돈대로 올라가 보니 허물어졌으나 형태는 짐작할 만하다. 여기 저기 널부러 있는 돈대의 흔적을 알 수 있는 돌들이 보인다. 석축은 무너져 돈대의 형태를 찾아보기 어려우나 자세히 보면 돈대의 흔적이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 돈대 위로 올라오니 석축을 쌓은 돈대의 흔적과 베어진 나무의 흔적이 뚜렸하게 보인다. 송곶돈대임을 알려주는 안내판- 돈대 아래쪽 기단에는 반듯한 석축의 흔적이 보인다.- 송곶돈대 주변은 펜션, 카페가 위치하고 있다. 송곶돈대 탐방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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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루지돈대(彌樓只墩臺) 

미루지돈대(彌樓只墩臺)는 인천광역시 강화군 화도면 여차리에 있는 조선시대의 돈대이다. 1999년 3월 29일 인천광역시의 기념물 제40호로 지정되었다. 

돈대는 적의 움직임을 살피거나 공격에 대비하기 위하여 영토 내 접경지역 또는 해안지역의 감시가 쉬운 곳에 마련한 초소이다. 대개 높은 평지에 쌓아두는데, 밖은 성곽으로 높게 하고, 안은 낮게 하여 포를 설치해 두는 시설물이다. 이 돈대는 높이 2.2m, 둘레 128m의 규모로, 성곽은 돌을 이용해 직사각형으로 쌓고, 해안쪽을 향해 4개소의 포좌(포놓는 자리)를 설치해 놓았다. 성곽 위에는 몸을 숨길 수 있도록 낮게 쌓았던 담의 흔적만 남아 있다. 출입구는 윗부분이 무지개 모양을 이루고 있어 다른 돈대와는 다른 독특한 모습이다. 조선 숙종 5년(1679) 윤이제가 강화유수로 있을 때 설치한 것으로, 장곶보의 관리하에 있었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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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일곶돈대(北一串墩臺) 

북일곶돈대(北一串墩臺)는 인천광역시 강화군 화도면 장화리에 있는 조선시대의 돈대이다. 1999년 3월 29일 인천광역시의 기념물 제41호로 지정되었다.

돈대는 적의 움직임을 살피거나 공격에 대비하기 위해서 영토내 접경지역 또는 해안지역의 감시가 쉬운 곳에 마련한 초소이다. 대개 높은 평지에 쌓아두는데, 밖은 성곽으로 높게 하고, 안은 낮게 하여 포를 설치해 두는 시설물이다. 장곶보의 관리하에 있었던 이 돈대는 높이 2.5m, 둘레 120m 의 규모를 지닌 직사각형으로, 포좌(포를 놓는 자리) 4곳과, 치첩 32개소를 두었다. 성곽 위에는 몸을 숨길수 있도록 낮게 쌓았던 담의 흔적만 남아 있다. 조선 숙종 5년(1679) 윤이제가 강화유수로 있을 때 설치한 것으로, 함경도·황해도·강원도의 승군 8,000명과 경상도군위어영군사 4,300명이 동원되어 40일만에 지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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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곶돈대(長串墩臺) 

인천광역시 강화군 화도면에 있는 조선후기 장곶보에 설치한 돈대. 성곽시설. 시도기념물.

1995년 인천광역시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강화 53돈대 가운데의 하나이다. 1679년(숙종 5)에 축조되었으며, 주위가 96보에 치첩(雉堞 : 성벽에서 돌출시켜서 쌓은 성벽, 그 위에 첩을 둘러침.)이 40개이다. 미곶(彌串)·북일곶(北一串)·검암(黔巖) 등 3개의 돈대와 더불어 장곶보(長串堡)의 관할 하에 있었다. 40∼120㎝의 방석(方石)으로 둥글게 축조되었고, 해안 쪽으로 4개의 포좌(砲座)가 설치되었으며, 상단에는 벽돌로 된 치첩이 90㎝ 간격으로 돌려져 있었으나 현재는 남아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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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수돈대(船首墩臺) 

선수돈대(船首墩臺)는 인천광역시 강화군 화도면 내리에 있는 조선시대의 돈대이다. 1995년 3월 1일 인천광역시의 문화재자료 제10호로 지정되었다.

돈대란 적의 움직임을 살피거나 공격에 대비하기 위하여 영토내 접경지역 또는 해안지역의 감시가 쉬운 곳에 마련해 두는 초소이다. 보통 높은 평지에 쌓아두며, 밖은 성곽으로 높게 하고 안은 낮게 하여 포를 설치해둔다. 특히 강화도에 있는 돈대들은 조선 인조 14년(1636) 병자호란이 일어나 강화도가 함락되자, 이에 놀란 조정에서 해안 경비를 튼튼히 하기 곳곳에 쌓아두도록 한 것이다. 이 돈대는 당시 병조판서를 지내던 김석주의 명을 받아 쌓은 49돈대 중 하나로, ‘송강돈대’라고도 불린다. 일부는 둥글게, 일부는 각이 지게 쌓아 위에서 내려다 볼 때 반달모양의 평면을 이루고 있다. 남쪽으로는 검암돈대가 있고, 북쪽으로는 굴암돈대가 있는데, 이 돈대와 굴암돈대는 관아에서 직접 관할하였다. 조선 숙종 5년(1679)에 축조된 것으로, 강화유수 윤이제가 어영군을 동원하여 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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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니산 주변숙소&식당 

마니산호스텔; 032-937-9317, 인천 강화군 화도면 마니산로 68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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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가집 식당; 032)937-7115, 인천 강화군 길상면 해안동로 24-5,

(돌솥정식 1만2천원, 낙지볶음1만원, 무채굴밥 8천원, 청국장 7천원, 해물전 8천원)

며느리나물보리밥 식당; 032)937-8851, 인천 강화군 길상면 해안동로 24-15,

(나물보리밥 7천원, 굴나물돌솥밥 9천원, 매생이국 9천원, 매밀전병 8천원, 감자전 8천원)

갯배생선구이 식당; 063)937-7714, 인천 강화군 길상면 해안동로 14-6,

(모듬생선구이정식(1인분) 1만4천원, 오징어순대 2만원, 아바이순대 1만 8천원)

 2022년 0월 0일(2일차) 인천 강화도 관광 트레킹 코스 

0월 0일(토) 마니산호스텔 출발 송강돈대 주차장  굴암돈대 주차장  건평돈대 주차장 

 망양돈대 주차장  삼암돈대 주차장  계룡돈대 주차장  망월돈대및장성 주차장  

무태돈대 주차장  광암돈대 주차장  월곶돈대 주차장  옥창돈대 주차장  염주돈대 주차장 

 갑곶돈대 주차장  더리미 순국터 주차장  용진진 주차장  W모텔

거리; 69.9km, 시간; 약2시간 30분, 통행료; 약 0원, 주유비; 약 10,739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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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로주소 

송강돈대 주차장; 인천 강화군 화도면 내리 323-1(내리 102) ↝ 굴암돈대 주차장; 인천 강화군 양도면 하일리 487-6 ↝ 건평돈대 주차장; 인천 강화군 양도면 건평리 산 39  망양돈대 주차장; 인천 강화군 내가면 외포리 680 ↝ 삼암돈대 주차장; 인천 강화군 내가면 황청리 산 175 ↝ 계룡돈대 주차장; 인천 강화군 내가면 황청리 282 ↝ 망월돈대및장성 주차장; 인천 강화군 하점면 망월리 2107 ↝ 무태돈대 주차장; 인천 강화군 하점면 창후리 산 151-4 ↝ 광암돈대 주차장; 인천 강화군 양사면 인화리 산 32 ↝ 연미정+곶진+월곶돈대 주차장; 인천 강화군 강화읍 월곳리 242 ↝ 회우당+옥창돈대 주차장; 인천 강화군 강화읍 옥림리 115 ↝ 염주돈대 주차장; 인천 강화군 강화읍  강화전쟁 박물관+세계테마 전시관+갑곶돈대 주차장; 인천 강화군 강화읍 갑곳리 225-9 ↝ 더리미 순국터 주차장; 인천 강화군 선원면 신정리 676  좌강돈대+용진진 주차장; 인천 강화군 선원면 지산리 216  W모텔; 인천 강화군 길상면 해안남로 1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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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년 0월 0일(2일차) 인천 강화도 관광 트레킹 코스 

 강화도 해안수비 진지 관광 트레킹 코스 

송강돈대 ↝ 굴암돈대 ↝ 건평돈대 ↝ 망양돈대 ↝ 삼암돈대 ↝ 계룡돈대 ↝ 망월돈대및 장성 

↝ 무태돈대 ↝ 광암돈대  연미정+곶진+월곶돈대 ↝ 회우당+옥창돈대 ↝ 염주돈대 

↝ 강화전쟁 박물관+세계테마 전시관+갑곶돈대 ↝ 더리미 순국터 ↝ 좌강돈대+용진진

2022년 0월 0일(2일차) 강화도 돈대 역사유적답사 관광 트레킹 코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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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강돈대 

이 송강돈대에는 약간의 토축과 돌덩어리 몇 개가 뒹굴고 있을 뿐이다. 한때 번듯한 성채를 이루며 강석해협을 굽어보던 위용은 찾을 길이 없다. ​돈대의 북쪽으로 일제강점기 때 인근의 송강수문을 개축하면서 쌓은 제방이 있는데, 주민들의 말에 따르면 제방을 쌓을 당시 돈대의 석재를 기단석까지 뿌리째 들어내어 옮겨 쌓았다고 한다. 그 때문에 돈대의 석재가 대부분 훼손되어 지금은 면석약간과 토축만 남아 있을 뿐이다. 이처럼 돈대의 원형을 거의 잃어버렸지만 일부 바닥에 남은 석재와 내부 토축의 흔적으로 그 윤곽을 간신히 알 수 있을 정도다. 송강돈대의 형태는 동서 약 19m, 남북 44m, 둘레는 125m 크기로 길죽한 직사각형이며 서쪽을 면한 돈대이다. 치첩(雉堞:성가퀴)이 40개이며, 따로 돈장(墩將)을 두어  강화부 영문(營門)에서 직접 관할한 중요한 돈대였다.

보통 강화의 54개 돈대들은 강화부 영문 직할 돈 6개 외에는 모두 지방군 단위인 진(鎭)이나 보(堡)에 소속되어 운영되었는데,  대대급인 진이 중대급인 보보다 규모가 좀 크지만 상하관계가 아니라 각기 독립된 부대였다. 이들의 지휘를 받는 돈대는 말하자면 소대급 단위로, 30명 안팎의 군졸들이 돈대에서 수직했다고 하니, 54개 돈대의 병력은 줄잡아 1,600명쯤 되었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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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굴암돈대(屈岩墩臺) 

굴암돈대(屈岩墩臺)는 인천광역시 강화군 양도면 하일리에 있는 조선시대의 돈대이다. 1999년 3월 29일 인천광역시의 기념물 제39호로 지정되었다.

돈대는 적의 움직임을 살피거나 공격에 대비하기 위해서 영토 내 접경지역 이나, 해안지역의 감시가 쉬운 곳에 마련해 두는 초소이다. 대개 높은 평지에 쌓아두는데, 밖은 성곽을 높게 하고, 안은 낮게 하여 포를 설치해 두는 시설물이다. 정포보 소속의 이 돈대는 타원형에 가까운 형태로, 포를 설치해 두기 위한 포좌를 4곳에 설치하였다. 조선 숙종 5년(1679) 윤이제가 강화유수로 재임해 있을 때, 병조판서 김석주의 명을 받아 쌓아놓은 것이라고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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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건평 돈대(乾坪 墩臺) 

건평 돈대(乾坪 墩臺)는 인천광역시 강화군 양도면 건평리에 있는 조선시대의 돈대이다. 1999년 3월 29일 인천광역시의 기념물 제38호로 지정되었다.

돈대는 적의 움직임을 살피거나 공격에 대비하기 위해서 영토내 접경지역 이나 해안지역의 감시가 쉬운 곳에 마련해 두는 초소이다. 대개 높은 평지에 쌓아두는데, 밖은 성곽을 높게 하고, 안은 낮게 하여 포를 설치해 두는 시설물이다. 이 돈대는 정포보 소속의 돈대로서, 6조(六朝)에 올리는 조운의 감시소 역할과 국토방위의 임무를 겸하였다고 한다. 조선 숙종 5년(1679) 윤이제가 강화유수로 있을 때, 병조판서 김석주의 명을 받아 이 돈대를 설치하였다고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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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망양 돈대(望洋墩臺) 

인천광역시 강화군 내가면 외포리에 있는 조선시대의 돈대이다. 돈대는 해안가나 접경 지역에 쌓은 소규모 관측, 방어시설이다. 강화도는 예부터 해안 방어를 위한 전략적 요충지로 여겨져 왔다. 1679년(숙종 5)에는 병조판서 김석주에게 강화도를 돌아보게 한 뒤에 48개의 돈대를 쌓게 했는데, 망양돈대도 이때 만들어졌다. 망양돈대는 방형 구조로 둘레가 130m, 석벽의 높이는 300~340m, 폭 2.5m이다. 대포를 올리기 위한 포좌 4개소와 치첩(성 위에 낮게 쌓은 담) 40개소가 있고, 윗부분에는 벽돌로 만든 여장(몸을 숨기고 적을 공격하기 위해 성 위에 덧쌓은 낮은 담)의 흔적이 남아있다. 동쪽으로 외포리 항이 있고, 바로 아래에 삼별초항몽유허비가 있다. 남쪽은 급경사로 거의 절벽에 가깝다. 주위에는 남쪽으로 3.2km 떨어진 곳에 건평돈대가 있고, 서쪽으로 1.3km 떨어진 곳에 삼암돈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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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암돈대(三岩墩臺) 

삼암돈대(三岩墩臺)는 인천광역시 강화군 내가면 외포리에 있는 조선시대의 돈대이다. 1999년 3월 29일 인천광역시의 유형문화재 제35호로 지정되었다. 돈대란 적의 움직임을 살피거나 공격에 대비하기 위하여 영토 내 접경지역 또는 해안지역의 감시가 쉬운 곳에 마련해두는 초소이다. 대개 평지가 높은 곳에 마련해두며, 밖은 성곽으로 높게 하고, 안은 낮게 하여 포를 설치해둔다.

조선시대에도 17세기∼18세기에 해안을 따라 6개의 진(鎭)과 7개의 보(堡), 9개의 포대(砲臺)와 함께 53개 돈대가 설치되었다. 이 돈대는 그 가운데 하나이다. 강화도 외포리 마을에 축조된 이 돈대는 다른 것과는 달리 둥글게 쌓여 있으며, 대포를 올려놓는 받침대가 4곳 설치되었다. 성위로 낮게 쌓은 담이 55개 있었다 하나 지금은 모두 사라지고 그 흔적만 남아있다.

조선 숙종 5년(1679) 강화유수 윤이제가 병조판서 김석주의 명을 받아 쌓은 것으로, 경상도 군위어영군 8천여명이 동원되었다 한다. 이 돈대는 군사 요충지인 강화도에 설치된 군사시설의 하나로, 조선 숙종 때의 축성 기술을 잘 간직하고 있는 국방 유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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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룡돈대(鷄龍墩臺) 

계룡돈대(鷄龍墩臺)는 인천광역시 강화군 내가면 황청리에 있는 조선시대의 돈대이다. 1995년 3월 1일 인천광역시의 기념물 제22호로 지정되었다. 돈대는 적의 움직임을 살피거나 공격에 대비하기 위해서 영토내 접경지역이나 해안지역의 감시가 쉬운 곳에 마련한 초소로, 대개 높은 평지에 쌓아두는데 밖은 성곽으로 높게 하고, 안은 낮게 하여 포를 설치해두는 시설물이다.

망월평야 남서방향의 언덕 위에 자리하고 있는 이 돈대는 바깥벽 측면에 기록이 남아 있으며, 망월돈대와 함께 관아에서 관리하던 돈대이다. 남아 있는 기록에 의해 조선 숙종 5년(1679)에 설치된 것임을 알 수 있는데, 이처럼 돈대의 제작년대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는 것은 보기드문 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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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망월돈대 및 장성(望月墩臺 및 長城) 

인천 강화군 하점면에 위치한 망월돈대(望月墩臺)는 조선 숙종 5년(1679년)에 쌓은 48 돈대 가운데 하나인 유적 건조물로, 1995년 인천광역시 문화재자료로 등록된 곳이다. 돈대(墩臺)는 해안가나 접경 지역에 쌓은 소규모 관측· 방어시설로 병사들이 돈대 안에서 경계 근무를 서며 외적의 척후 활동이나 수상한 정황을 살피고 대처한다. 망월돈대는 가로 38m, 세로 18m, 높이 2.5m로 40~120층의 돌을 직사각형으로 쌓아 올린 것으로, 성곽 위로는 흙벽돌로 낮게 쌓은 담장이 둘려 있었으나 지금은 흔적만 남아 있다. 돈대와 함께 있는 장성(長城)은 고려 고종이 강화도로 도읍을 옮기면서 해안방어를 튼튼히 하기 위해 길이 7m, 너비 1.5m로 쌓아 올린 것으로 누각을 설치한 출입문이 6곳, 물길이 드나드는 문이 7곳 마련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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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태돈대(無殆墩臺) 

무태돈대(無殆墩臺)는 인천광역시 강화군 화도면 창후리에 있는 조선시대의 돈대이다. 1999년 3월 29일 인천광역시의 문화재자료 제18호로 지정되었다.

돈대란 적의 움직임을 살피거나 공격에 대비하기 위하여 영토 내 접경지역 또는 해안지역의 감시가 쉬운 곳에 마련해 두는 초소이다. 보통 높은 평지에 쌓아 두는데, 밖은 성곽으로 높게 하고 안은 낮게 하여 포를 설치해 둔다. 특히 강화도에 있는 돈대들은 조선 인조 14년(1636) 병자호란이 일어나 강화도가 함락되자, 이에 놀란 조정에서 해안 경비를 튼튼히 하기 곳곳에 쌓아두도록 한 것이다.

창후리 선착장에서 북쪽으로 난 비포장길을 따라 100m 정도 떨어진 곳에 자리하고 있는 이 돈대는 해안을 따라 직사각형으로 길게 쌓았다. 강화유수를 지내던 윤이제가 해안 방어를 튼튼이 하기 위하여 쌓은 여러 돈대들 중 하나로, 대포를 올려놓는 포좌를 해안을 향해 4곳 설치해 두었다. 조선 숙종 5년(1679) 어영군 2천명과 경기·충청·전라 3도 승병 8천명을 동원하여 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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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곶돈대 & 연미정(燕尾亭) 

강화군 강화읍 월곶리에 위치한 연미정은 1995년 3월 1일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된 정자이다. 자연경관을 보며 풍류를 즐기거나 학문을 공부하던 정자로, 최초 건립연대는 정확히 알지 못하나 임진왜란, 병자호란, 6.25 전쟁을 거치며 여러 차례 시련을 겪고 파손된 것을 현재와 같이 복원하였다. 정자는 지붕 옆면이 여덟 팔(八) 자 모양인 팔작지붕집의 겹처마로 돌기둥 위에 10개의 기둥을 얹어 건축한 민도리집이다. 한강과 임진강의 합해진 물줄기가 강화도 동북단에 이르러 서쪽과 남쪽으로 나뉘어 흐르는데, 이 모양이 마치 제비꼬리 같다고 하여 연미정이라 이름이 붙여졌다. 이곳은 강화십경의 하나로 손꼽히는 자리로서 절경을 이루고 있으며, 월곶돈대 꼭대기에 세워져 있어 파주와 김포, 황해도 개풍군(북한) 일대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 연미정에서 바라보는 탁 트인 바다의 풍광과 정자 양쪽에 수백 년 된 수령의 느티나무 두 그루가 웅장한 자태로 정취를 더해주고 있다. 그동안 연미정은 군사보호 구역으로 지정되어 일반인의 출입이 엄격히 제한되어 군부대(검문소)의 허락을 받아야만 출입이 가능하였지만, 2008년 통제구역이 해제되어 현재는 신분증만 제시하면 일반인들도 출입이 가능해졌다.

 연미정을 어느 방면에서 방문하느냐에 따라 신분증 제시에 대한 여부가 다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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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화 갑곶돈(江華 甲串墩) 

갑곶돈대는 고려가 1232년부터 1270년까지 도읍을 강화도로 옮겨 몽고와의 전쟁에서 강화해협을 지키던 중요한 요새로, 대포 8문이 배치된 포대이다. 삼국시대 강화를 갑비고차(甲比古次)라 부른데서 갑곶이라 이름이 전해오는 것으로 보기도 하고, 고려 때 몽고군이 이곳을 건너려고 하다 뜻을 이루지 못하고 안타까워하며 ‘우리 군사들이 갑옷만 벗어서 바다를 메워도 건너갈 수 있을 텐데’라 한탄했다는 말에서 유래했다는 전설도 있다. 조선 1644년 강화의 요충지마다 군대 주둔지를 설치할 때, 제물진에 소속된 돈대로서 1679년에 완성되었다. 고종 3년(1866) 9월 병인양요 때 프랑스의 극동함대가 600여명의 병력을 이끌고 이곳으로 상륙하여 강화성과 문수산성을 점령하였다. 그러나 10월에 정족산성에서 프랑스군은 양헌수 장군의 부대에게 패하여 달아났다.

1977년에 옛터에 새로이 옛모습을 되살려 보수, 복원이 이루어졌다. 지금 돈대 안에 전시된 대포는 조선시대 것으로 바다를 통해 침입하는 왜적의 선박을 포격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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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진진(龍津鎭) 

용진진(龍津鎭)은 인천광역시 강화군 선원면에 있는 조선시대의 성이다. 1999년 3월 29일 인천광역시의 기념물 제42호로 지정되었다.

진이란 군인이 머물러 있던 무장 성곽도시를 이른다. 용진진은 조선시대 각 진에 배치되었던 병마만호의 관리하에 있었던 곳으로, 101명의 병력이 주둔해 있었다 한다.

포좌(포를 놓는 자리) 4개소, 총좌(총을 놓는 자리) 26개소의 시설물이 있었으나 석축 대부분은 남아 있지 않다. 다만 윗부분이 무지개 모양을 이루고 있는 출입문 2곳만이 남아 있었는데, 1999년 그 위로 누각을 새로이 복원해 놓았다. 조선 효종 7년(1656)에 축조되었으며, 가리산돈대·좌강돈대·용당돈대 등 3개의 돈대를 관리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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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화초지대교 주변숙소&식당 

W모텔; 032)937-8235, 인천 강화군 길상면 해안남로 13-15,  예약정보 (옥션)

(일반실 3만 5천원, 준특실 4만원, 특실 5만원, VIP룸(넷플릭스, 스파욕조보유) 7만)

블루모텔(특); 032)937-5303, 인천 강화군 길상면 해안동로 118,  

 K2모텔(특); 032)937-7450, 인천 강화군 길상면 초지리 636-4, 

프라하모텔; 032)937-3011, 인천 강화군 길상면 해안동로 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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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가집 식당; 032)937-7115, 인천 강화군 길상면 해안동로 24-5,

(돌솥정식 1만2천원, 무채굴밥 8천원, 청국장 7천원, 해물전 8천원, 낙지볶음 1만원)

며느리나물보리밥 식당; 032)937-8851, 인천 강화군 길상면 해안동로 24-15,

(나물보리밥 7천원, 굴나물돌솥밥 9천원, 매생이국 9천원, 밀전병 8천원, 감자전 8천원)

갯배생선구이 식당; 063)937-7714, 인천 강화군 길상면 해안동로 14-6,

(모듬생선구이정식(1인분) 1만4천원, 오징어순대 2만원, 아바이순대 1만 8천원)

 2022년 0월 0일(3일차) 인천 강화도 관광 트레킹 코스 

0월 0일(일) W모텔 출발 용당돈대 주차장  화도돈대 주차장  오두돈대 주차장  

강화전성 주차장  강화광성보 주차장  덕진진 주차장 초지진 주차장  대전

거리; 약 240.8km, 시간; 약 5시간 통행료; 약 11,200주유비; 약 44,51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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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로주소 

용당돈대 주차장; 인천 강화군 선원면 연리 산 4-11 ↝ 화도돈대 주차장; 강화군 선원면 연리 54 ↝ 오두돈대 주차장; 강화군 불은면 오두리 3 ↝ 강화전성 주차장; 강화군 불은면 오두리 563 ↝ 신미순의총+손돌목돈대+용두돈대+강화광성보 주차장; 강화군 불은면 해안동로466번길 27 ↝ 덕진진 주차장; 강화군 불은면 덕성리 355 ↝ 초지진 주차장; 강화군 길상면 해안동로 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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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년 0월 0일(3일차) 인천 강화도 관광 트레킹 코스 

용당돈대 ↝ 화도돈대 ↝ 오두돈대 ↝ 강화전성 ↝ 

신미순의총+손돌목돈대+용두돈대+강화광성보 ↝ 덕진진 ↝ 초지진

2022년 0월 0일(3일차) 강화도 돈대 역사유적답사 관광 트레킹 코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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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당돈대 

용당돈대는 염하수로 해안가를 따라 있다. 초지대교에서 강화읍으로 향하는 해안도로를 달리다가, 오두돈대 화도돈대를 지나다가, 용진진 못 미처 작은 고개를 돌 즈음에 ‘용당돈대’ 이정표를 만날 수 있다. 용당돈대는 숙종 5년(1679)에 강화에 설치된 48개 돈대 가운데 하나다. 조선 숙종 때 강화에는 48개 돈대가 지어졌다. 관병과 승려 1만 5000명을 동원해 48개 돈대를 80일 만에 축성했다. 그 뒤로 강화에는 14개가 더해져 54개 돈대가 지어졌고, 지금은 멸실된 곳도 있어 40개 정도가 남아 있다.
용당돈대는 용진마을 남쪽 소구산에서 염하로 이어지는 능선의 끝자락 정상에 위치한다. 해상에서 볼 때 용당돈대는 약 10미터가량되는 절벽에 지어졌는데, 이는 강화의 자연·지리적 환경을 살려 축성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동서·남동 방향으로 길게 타원형을 이루며, 돈대 둘레는 약 119미터라고 알려져 있다. 2000년에 보수공사를 할 때 여장을 제외한 성벽과 문지, 포좌 등을 복원했다. 돈대를 둘러싼 담장을 한 바퀴 돌면 새로 단장했는지 대번에 알 수 있다. 옛돌과 새로 쌓은 돌이 확연하게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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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도돈대(花島墩臺) 

화도돈대(花島墩臺)는 인천광역시 강화군 선원면 연리에 있는 조선시대의 돈대이다. 1999년 3월 29일 인천광역시의 문화재자료 제17호로 지정되었다.

돈대는 해안가나 접경 지역에 쌓은 소규모 관측·방어시설이다. 병사들이 돈대 안에서 경계근무를 서며 외적의 척후 활동을 비롯한 각종 수상한 정황을 살피고 대처한다. 적이 침략할 때는 돈대 안에 비치된 무기로 방어전을 펼친다. 1679년(숙종 5) 5월에 완성된 48돈대에 이후 5개 돈대가 추가로 지어졌다. 48돈대는 황해도·강원도·함경도 승군 8,900명과 어영청 소속 어영군 4,262명이 80일 정도 걸려서 쌓았다. 돈대 축조를 기획하고 감독한 이는 병조판서 김석주였고 실무 총괄은 강화유수 윤이제였다.

화도돈대는 1679년(숙종 5)에 쌓은 48돈대 가운데 하나로 오두돈대·광성돈대와 함께 광성보에 속했다. 원래는 화도보 소속이었으나, 1710년(숙종 36)에 화도보가 폐지되면서 광성보의 지휘를 받게 되었다. 방형 구조로 둘레가 129m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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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화전성(江華塼城) 

강화 전성을 포함하는 강화 외성의 길이는 약 23㎞이고, 그 중 강화 전성은 약 270m로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아래쪽은 돌을 다듬어서 쌓고 위쪽은 벽돌을 8~10단으로 쌓아 올렸는데, 벽돌은 강회붙임으로 연결하고 어긋매김 공법으로 축조하여 허물어짐을 방지하였다. 관리 소홀로 허물어진 채 있던 강화 전성을 현대에 들어 재정비하였다.

강화 전성은 수원 화성과 더불어 우리나라 전축성(塼築城) 연구에 귀중한 자료를 제공해 준다. 특히 강화 전성은 1794년에 축성하기 시작한 수원 화성보다 50여년 정도 이른 시기에 축성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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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미순의총(辛未殉義塚) 

1871년(고종 8년) 4월 23일 신미양요 당시 광성진에서 벌어졌던 광성진 전투에서 중군 어재연 장군과 아우 재순을 비롯한 군관, 사졸 53인의 전사자가 발생했다. 이들 중 어재연 형제는 고향인 충청북도 음성군 대소면 성본리에 안장하고, 남은 군졸 51인은 신원을 분별할 수 없어 7기의 분묘에 합장하여 그 순절을 기리고 있다. 조선군은 광성보 전투에서 최후의 한 명까지도 포로가 되기를 거부하고 비겁하게 물러서지 않았으니, 외침에 대항하여 나라를 지키려는 살신호국 정신을 보여준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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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돌목 돈대 (孫乭項▽墩臺) 

인천광역시 강화군 불은면(佛恩面) 덕성리(德城里)에 있는 강화53돈대의 하나. 덕진돈대와 함께 덕진진에 소속되어 있으며 뱃사공 손돌의 전설에서 돈대의 이름을 땄다.

1679년(숙종 5)에 축조하였는데, 강화도의 다른 돈대들이 사각 모양인 것과는 달리 원 모양으로 만들었다. 1866년의 병인양요(丙寅洋擾)와 1871년의 신미양요(辛未洋擾) 때 외국 함대들과 치열한 전투가 있었던 곳으로서, 1977년 강화 중요 국방유적 복원정화사업으로 파괴되었던 성벽을 복원하였다. 돈대 입구에는 서해안 지역의 북한계선 식물인 탱자나무가 자라고 있다. 손돌목돈대에서 동쪽으로 내려다 보이는 곳에 용두돈대가 있는데, 그 앞의 염하(강화와 김포의 경계를 이루는 수역)를 뱃사공 손돌이 왕의 오해로 억울하게 죽은 곳이라 하여 손돌목이라고 한다. 염하 건너편 동남쪽에 덕포진이 있는데, 덕포진 언덕 위에 손돌의 묘가 있다.

 

조선 시대의 돈대. 1679년에 축조되었으며, 지금의 모습은 1977년에 보수ㆍ복원한 것이다. 1871년 신미양요 때 미 해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던 곳으로, 손돌목 전설에서 이름이 유래했다고 알려져 있다. 광성보에는 광성 돈대 말고도 보급 창고 역할을 했던 손돌목 돈대와 용의 모양을 닮았다 해서 이름 붙여진 용두 돈대가 있다. 

손돌목 돈대는 용두 돈대로 가는 길에 있는 돈대로, 구릉 정상부에 설치됐다.  주간동아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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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덕진진(德津鎭) 

인천광역시 강화군 불은면(佛恩面덕성리(德成里) 있는 조선 시대의 요새

강화 해협을 지키던 요충지로신미양요(辛未洋擾) 병인양요(丙寅洋擾때의 격전지였다.

강화 12진보(鎭堡)의 하나이다. 1971년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지정면적 15,018㎡. 현재 문루(門樓) · 포대(砲臺)와 성곽 · 돈대(墩臺)가 남아 있다. 병자호란 뒤 강화도의 방비책을 강구하여 내성(內城) · 외성(外城) · 진보 · 돈대 등을 축조하였는데 12진보는 그 중의 하나로 강화도 주위에 설치되었다. 덕진진은 원래 수영(水營)에 속하여 첨사(僉使)를 두고 있었는데, 1666년(현종 7) 강화유수 서필원(徐必遠)의 계청(啓請)으로 첨사를 통진(通津)땅 덕포(德浦)로 옮기고 이곳에 별장(別將)을 두었으며, 1677년(숙종 3) 유수 허질(許秩)의 계청에 따라 만호(萬戶)로 승격시켰다. 덕진진은 1679년에 축조된 용두(龍頭) · 덕진 등 2개 돈대와 1874년(고종 11)에 축조된 남장(南障) · 덕진 등 2개 포대를 관할하는, 강화해협에서 가장 강력한 포대였다.

1866년 병인양요 때는 양헌수(梁憲洙)가 이끄는 부대가 이 진을 통하여 정족산성(鼎足山城)으로 들어가 프랑스군을 격퇴하였고, 1871년 신미양요 때는 치열한 포격전 끝에 미국함대를 격퇴시켰으나, 초지진(草芝鎭)에 상륙한 미국해병대에 의하여 점령당하는 비운을 맞았다. 이 때 성첩과 문루가 모두 파괴되고 문루지(門樓址)만 남게 되었다. 1976년 돈대와 성곽을 보수하였으며 홍예(虹霓 : 무지개 모양의 문)를 틀고 정면 3칸, 측면 2칸의 문루도 다시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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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지진(草芝鎭) 

해상으로부터 침입하는 적을 막기 위하여 구축한 요새로, 조선왕조실록이나 승정원일기에서 초지진 설치에 대한 기사에 따르면 조선 효종 6년(1655)에 설치된 것으로 보인다.
1870년대에 미국과 일본이 침략하였을 때 이들과 맞서 싸운 곳으로 1871년에 미국 해병이 초지진에 침략해 왔을 때 전력의 열세로 패하여 점령당하였다. 이 때 군기고, 화약창고 등의 군사시설물이 모두 파괴되었다. 일본이 조선을 힘으로 개항시키기 위해서 파견했던 운양호의 침공은 고종 13년(1876)의 강압적인 강화도 수호조약으로 이어져 일본침략의 문호가 개방되었다. 그 뒤 허물어져 돈대의 터와 성의 기초만 남아 있었으나 1973년 초지돈을 복원하였다. 민족시련의 역사적 현장이었던 이곳은 호국정신의 교육장이 되도록 성곽을 보수하고 당시의 대포를 진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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